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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공간 – ⑨ 배다리 주택 ‘오붓’

열차 기적과 뱃고동···
기억, 소리로 남다

공간은 곧 사람을 의미한다. 숨 쉬고 머무는 자리마다 살아온 시간과 삶을 대하는 태도, 생각이 스며든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아주 사적인 공간’에 들어가, 그 안에 숨겨진 또 다른 인천을 본다. 이번 호에는 경인방송 안병진 PD와 이진희 작가 부부가 사는 배다리 주택 ‘오붓’을 찾았다. 도심의 아파트에 살 때는 ‘소리’가 아닌 ‘소음’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 동네에선 1호선 열차의 기적과 항구의 뱃고동 소리, 창영초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음악처럼 들려온다.

 

정경숙 본지 편집장 | 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

낮은 담장을 두른 ‘오붓’ 앞에서, 원도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안병진, 이진희 부부
2층 발코니 옆 의자에 편히 앉으면, 여기가 ‘오롯이 내 집, 내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유욕과는 다른 느낌이다.

새벽빛이 밝아올 무렵, 부부는 ‘부~’ 하는 뱃고동 소리에 잠을 깼다. ‘바다가 이렇게 가까이 있었나.’ 바닷물이 드나드는 큰 개울과 배를 대는 다리가 있다는 데서 유래한 ‘배다리’. 동네에 그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동갑내기 안병진(43), 이진희(43) 부부는 동구 창영동 배다리에 산다. 경인방송 라디오 PD와 작가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지 8년. 신도시가 아닌 원도심,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이 그들 삶의 터전이다. 처음엔 연수동에 있는 오래된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꾸렸다. 가진 것에 맞추다 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전세 계약이 끝날 때마다 아파트를 전전해야 했다. ‘우리도 집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그러다 ‘아파트 전셋값으로 주택을 사자’는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 원도심에 있는 오래된 집을 사 고쳐 살게 됐다.
중구 개항장 일대 주택가를 둘러보다 배다리까지 왔다. 인천 토박이 남편과 그를 따라 이 땅에 정착한 아내는 평소 함께 원도심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깊고 오래된 도시를 ‘발견’하는 과정이 즐거웠다. 하지만 마을 주민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 작가는 말한다. “시야를 넓히다 보니 무심코 스쳐 지나던 것들이 보이고 시각이 달라졌어요. 머물러 보니 왜 진작 옛 동네에 살기로 마음을 정하지 못했나 싶어요.”
언뜻 보면 평범하지만 세월이 깃든 낡은 풍경, 소중한 기억을 붙잡고 있는 고마운 동네 배다리. 처음엔 잘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인천이 일상으로 파고들었듯, 이 공간도 그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집 옥상에 오르면 헌책방이 보일 듯 말 듯하고, 창문으로는 옆집 기와 처마가 들어온다.

창영초등학교 바로 앞에 있는, 1980년대에 지은 48.47㎡(14.7평) 면적의 2층 벽돌집이었다. 40년 세월이 켜켜이 쌓인 건물은 높다란 담장 안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숨죽여 있었다. 동네와 한데 어우러지고 싶어 벽을 낮추는 일부터 했다. 담 너머로 마음과 마음이 오가고 골목 분위기가 밝아지자 동네 사람들도 반가워했다.
무엇보다 오래된 공간 안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 새롭게 이었다. 한 지붕 아래 두 가구가 모여 살던 조촐하고 아담한 집. 모두 고만고만한 형편이었지만 그 자리에서 오순도순 자식들 키우고 살림살이 불려가며 희망을 키웠을 것이다. 그 소박하지만 빛나는 삶의 의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살릴 수 있는 건 살리면서, 비우고 채우는 과정이 이어졌다. 건물 골조와 외관은 본모습 그대로 유지해 시간의 연속성을 이었다. 2층에 있는 나무틀로 감싼 유리 문도 원주인이 남기고 간 걸 거둬들인 것이다. 그렇게 어제와 오늘의 시간을 씨실과 날실로 엮어 오밀조밀 새롭게 꾸몄다. ‘오붓’이라는 정겨운 이름도 붙였다.
안 PD는 오래된 것에 담긴 ‘이야기’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다. “장소든 그 안에 담긴 물건이든, 시간이 흐르면 이야기가 쌓이고 쌓여 역사가 됩니다. 재개발을 앞두고 주인이 떠난 텅 빈 공간, 그 안에 남겨진 물건에도 스쳐간 사람의 마음이 투영되기 마련이지요. 그런 이야기들이 좋아요.”

부부가 새 숨을 불어넣은, 버려졌던 물건들.

원도심에 정착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2년 전 그 해 달력이 한 장 남았을 때, 이 동네로 와 살면서 가장 추운 겨울을 보냈다. 생활하는 데 기본인 도시가스를 들이는 일조차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었다. 사람들이 머물어야 원도심이 산다. 그러기 위해선 삶의 기반부터 갖춰져야 한다. 안 PD는 말한다. “마을에 꽃 심고 벽화를 그린다고 해서 원도심이 살아나는 건 아닙니다. 생활 인프라를 확충해 주민이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도시 재생’이 아닐까요?”
부부는 언젠가 사라질지 모르는 소리를 채집해 세상에 들려주는 일을 하고 있다. 남편이 인천 곳곳을 누비며 소리를 그러모으면, 아내는 이야기로 새 숨을 불어넣는다. 배다리에 온 후로는 잊혀가는 원도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 “나이 들수록 ‘내가 어떤 공간에 살아왔고 또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대부분 골목길 동네 출신입니다. 그곳을 떠난 사람들에게 잊힌 공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안 PD가 채집한 원도심의 소리는 다음 달 ‘골목길 사람들’이라는 프로그램으로 라디오 전파를 탄다. 항구의 뱃고동, 1호선 열차가 지나는 소리, 뗑그렁거리는 두부 장수의 종소리, 창영초등학교 야구부 아이들의 함성…. 까마득히 잊고 있던 소리들. 흘러가는 시간 속 기억의 일부가, 그의 녹음기 안에 오롯이 남겨져 다행이다.

‘튼튼한 집’과 ‘예쁜 집’ 중에서, 부부는 ‘10년 이상 살 튼튼한 집’을 택했다.
원도심의 소리를 담는 그의 녹음기. 인터뷰 내내도 켜져 있었다.
‘소리 채집꾼’ 안 PD는 오늘도 잊고 있던 소리를 찾아 골목골목을 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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