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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 강화 3·1 독립만세운동

강화도 그날의 뜨거운 함성

유난히 봄 햇살이 따스했던 1919년 3월 18일, 강화읍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장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사람들로 북적이던 장터는 오후 2시가 되자 순식간에 우렁찬 만세 소리로 뒤덮였다. 1만5,000여 명이 모인 강화읍 장터에서 울려 퍼진 “대한 독립 만세”. 강화도의 만세운동은 지방 단위로는 경남 진주와 더불어 큰 규모의
만세운동으로 기록됐다.

김윤경 본지 편집위원 | 도움 이은용 강화 3·1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

전국 최대 규모의 만세운동 불씨

3월 18일 강화도에서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 강화공립보통학교에서는 3월 12일과 13일 학생들이 주도하는 만세운동이 있었다. 교사의 만류와 경찰의 진압으로 교내 시위로 끝난 아쉬운 만세운동이었지만, 이 사건은 강화 지역 만세운동을 촉발시키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어린 학생들도 만세를 불렀는데 어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여론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만세운동은 감리교계 인사들과 학생층을 중심으로 추진됐다. 3월 1일 탑동공원(현 탑골공원) 만세운동과 3월 5일 남대문 밖 학생 연합 시위에 참가했던 연희전문학교 황도문은 휴교령이 내리자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 등의 유인물을 몰래 숨겨 강화도로 귀향했다.
황도문이 가지고 온 유인물을 본 유봉진은 만세운동을 결심한다. 은 세공업자인 유봉진은 원래 대한제국 강화진위대 출신 군인이었다. 당시 군 지휘자는 후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였다. 1907년 7월 일제는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는 조치를 취했다. 당시 스물한 살의 청년 유봉진은 이른바 ‘정미(丁未)의병’이란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된 사건에 참여하게 된다. 유봉진은 정미의병 활약 후 일제 군경의 감시망을 피해 감리교회 권사 신분으로 지낸다. 하지만 황도문과의 만남은 그의 가슴속에 묻어놓은 항일의 불씨를 되살린다.

용흥궁 공원 안에는 강화 3·1 독립만세 기념비와 유봉진 선생을 비롯한 시민들의 조형물이 있다.
강화진위대 출신의 유봉진 선생은 1907년 ‘정미의병’에서 항일투쟁을 벌였으며, 1919년 3월 강화도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905년 강화진위대 장교들의 기념사진(앞줄 가운데가 이동휘)

‘결사대장’ 유봉진을 선봉으로 펼쳐진 대규모 평화 시위

유봉진은 먼저 길상면의 감리교도들을 중심으로 ‘결사대’를 조직했다. 1919년 3월 9일 길직교회에서 길직리의 조종환, 장명순, 장동원, 장상용, 장삼수, 장흥환 등과 선두리의 황유부, 황도문, 염성오, 유희철, 온수리의 유봉진, 상방리의 이진형 목사 등이 회합했고, 유봉진은 결사대장을 맡았다. 유봉진은 강화도 각지를 돌아다니며 시위 참여를 독려했다. 특히 그는 속옷 상의에 ‘유봉진 독립결사대’라고 쓴 글씨를 펼쳐 보이며 함께할 동지들을 모았다.
3월 18일 강화읍 장날, 만세운동을 계획한 바로 그날이 왔다. 따스한 봄볕이 부드럽게 내리던 장터는 사람들로 붐볐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결사대원들은 때를 기다렸다. 드디어 오후 2시. 강화읍 웃장터와 아랫장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모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품속에 꼭꼭 숨겨왔던 태극기를 흔들며 감격에 겨워 만세와 함께 울음도 터져 나왔다. 만세운동 선봉에서 유봉진이 백마를 타고 시위대를 이끌었다. 1만5,000여 명이 넘는 인파가 모였지만, 유봉진의 지휘 아래 일사분란하게 시위가 진행되었다. 만세 행진은 군청과 객사, 향교, 경찰서까지 이어졌으며 인파는 점점 늘어나 경찰서 앞에서는 2만여 명에 이르렀다. 시위대의 성취감은 한층 고조되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민족적 자존심과 자부심이었다.

강화도 만세운동을 모의했던 길직교회
(출처 1969년 기독교대한감리회 사진 연감)
황유부, 염성오 등이 강화 만세운동에 쓰일 독립선언서를 등사·인쇄했던 선두교회에는 만세운동 기념비가 있다.

‘봉화 시위’로 이어진 강화도 만세운동

대규모 시위 소식을 접한 일제는 3월 19일 인천수비대 경찰 10여 명과 용산 주둔군 40명을 강화도에 급파했다. 강화도 전역에서 시위자 검거와 삼엄한 경비가 펼쳐졌다. 읍내에서 시작된 시위는 일제의 강력한 탄압에도 관내 전역으로 파급됐다. 온수리를 중심으로 강화 지역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크고 작은 만세운동이 이어졌고, 23일에는 시위가 교동도 전역으로 확산됐다. 특히 4월 1일 하점면 봉천산 봉천대 횃불 만세 시위를 시작으로 강화도 13개 읍면 전 지역에서 봉화 시위가 진행됐다. 봉화 시위는 경찰이 미처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주민들은 밤에 산에 올라 횃불을 밝히고 마음껏 만세를 부르고 자진 해산하는 방식으로 ‘평화적 시위’를 벌였다. 봉화대 불길이 산을 따라 전파되듯 강화도 곳곳에서는 한동안 야간 봉화 시위가 이어졌다. 끊어질듯 이어지는 강화 만세운동은 고대 역사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강화의 끈질긴 저항 의지를 보여주는 항일 민족투쟁이었다.

이은용 강화 3·1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끈질긴 강화도 만세운동의 저력을 이렇게 설명한다. “강화도는 병인양요, 신미양요, 강화도조약 등을 겪으면서 외세 침략에 맞서는 저항 의식이 남달랐던 지역입니다. 의병운동과 3·1운동이 한 축으로 연결돼 줄기차게 항일투쟁을 한 것도 이 같은 역사적 배경 때문일 것입니다.”
강화장터에서의 만세운동으로 군민 98명이 일제에 체포됐으며, 43명이 재판을 받고 형벌을 받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오히려 드높은 한민족의 자유와 독립의식을 세계에 알리고 민족의 결속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1910년대 잠두교회
1914년의 잠두교회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는 죽산 조봉암과 이동휘가 다닌 교회로, 1907년 일본군의 강화 기독교인 탄압에 저항하고 1919년 3월 18일 청년 교인 7명이 독립운동 유인물을 인쇄·배포한 곳이다.
현 강화중앙교회의 전경

[강화 만세운동의 특징]

▫ 강화장터 만세운동은 지방 단위로는 가장 큰 규모의 ‘평화 시위’
▫ 3월 말 섬 지역까지 산발적인 만세운동 전개
▫ 4월 1일부터 야간 시간을 이용한 봉화 및 횃불 시위 시작

참고 : 학술지 <강화3·1독립만세운동과 그 정신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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