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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인천 – 조각가 고정수

인천은 나의
자양분

인천에서 나고 자랐다.
1985년 첫 번째 조각 개인전을 열었으며, 인천광역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글·조각 고정수

인천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은 ‘바다’ 그리고 ‘개항 도시’다.
인천 앞바다를 거쳐 새로운 문물을 접한 대한민국! 그 역사의 중차대한 변곡점 역할을 다해온 인천 앞바다를 이웃하고 자라온 나의 삶, 역시 바다를 가까이한 운명적 격랑의 세월일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거의 매일 바다 개펄에 나아가, 개펄 흙뭉치를 마치 눈싸움하듯이 던지면서 친구들과 뒹굴며 천방지축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밀물과 썰물을 따라 겁도 없이 멀리 축항까지 나아가 온종일 망둥이 낚시질을 하고는 저녁 무렵이면 수확한 수백 마리의 망둥이를 검정 전깃줄에 꿰어 어깨에 걸치곤 짐짓 개선장군이라도 된 양 의기양양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한때 인천 시민 모두의 한여름 으뜸 피서지로 명성이 자자했던 낙섬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대신 그 자리엔 지금의 송도국제도시가 보무도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다. 당시엔 내가 다니던 신흥초등학교 부근인 답동, 신포동이 가장 중심가였고, 송도, 주안, 남동, 부평만 해도 외곽 지대였다. 최근 내 고향 인천이 부산, 대구를 제치고 서울 다음의 큰 도시로 뻗어나가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인천이 고향인 나로선 무척 흐뭇한 마음이다.

난 어렸을 때부터 워낙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내 어린 시절 그리움의 대상인 그 바다를 표현해 보고 싶은 마음으로 청관과 자유공원 그리고 하인천 부둣가에서 이젤과 화판을 들고 다니며 수채화에 열중하곤 했다. 또 당시 미술 실기 대회는 항상 청관을 기점으로 열렸기에 대회 전 좋은 구도를 잡으려는 의욕으로 곳곳을 미리 살피고 다니기도 했다. 또한 중·고교 시절, 내 삶의 큰 에너지를 생성하게 해준 미술 교사 송덕빈 선생님을 만난 것도 나로선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때 비로소 미술반 활동을 통하여 한 차원 높은 다양한 조형 감각을 터득하게 되었는데,

 

당시 수준으로는 획기적인 수업 방식이었다. 예를 들면 학생들에게 돌멩이를 가져오게 하여 모자이크 만들기, 신문지를 물에 불려 만든 종이 찰흙으로 탈이나 불상 만들기, 각종 플라스틱을 불에 그슬려 접착한 조형물 만들기 등 귀중한 체험을 했다. 그 후 미술반 출신들이 모여 ‘남미모(인천남중고 미술반 모임)’를 결성, 얼마 전엔 송덕빈 선생님 회고전도 열어드린 바 있다.

돌이켜보건대 바다에서 보냈던 유년 시절, 그리고 청관과 인천남중고 미술반의 소년 시절이 바탕이 되었기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하게 되었고 오늘에 이르렀다고 본다. 이렇듯 인천은 그 생각만으로도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내 존재감의 근원지이다.

얼마 전 인천 모도에서 실로 오랜만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생후 20년 동안 인천이라는 토양에서 자양분을 섭취한 후 다른 지역에서 가공된 나 자신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나의 뿌리인 인천에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쳐 불사르고 싶다고.
근대에 이르러 가장 성공한 이민 국가의 사례가 미국이다. 바라건대 인천이 토박이보다 오히려 외지 사람들이 많이 살 수 있는 진영 논리를 넘어선 에너지가 충만한 큰 그릇의 청년처럼 리버럴(Liberal)하게 거듭 나아가길 바란다. 마치 모든 물을 다 받아들여 묵묵히 정화시켜 나가는 한없이 넓고 큰 바다처럼 말이다.

자매-11 160x90x60cm 브론즈 1981
1 자매-21 59x46x40cm 대리석 2004
2 사이좋게 지내자 35×30.5x32cm 대리석 2014
3 약 오르지! 200x196x230cm 공기조형물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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