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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공간 ② 문병식 현악 공방

골목 공방에서, 삶을 연주하다

공간은 곧 사람을 의미한다. 숨 쉬고 머무는 자리마다 살아온 시간과 삶을 대하는 태도, 생각이 스며든다 .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아주 사적인 공간’에 들어가, 그 안에 숨겨진 또 다른 인천을 본다. 그 두 번째로, 계산동 상가 골목에 있는 문병식(50) 현악기장의 공방을 찾았다. 그가 처음 나무를 만져 악기를 만든 건, 30여 년 전 도시 변두리의 공장에서다.

정경숙 본지 편집장│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

동고동락하는 고양이 깨순이, 깨미와 함께. 그의 음악에
귀 기울이는 청중들이 있는, 행복한 연주회.

공장에서 골목까지

계산동 상가 골목, 불빛이 부옇게 번지는 창 너머로 한 남자가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다. 그 흔한 간판도 없다. 문을 열고 들어가 나무 먼지를 뒤집어쓰고 천장에 매달린 악기들을 보고 나서야, 이곳이 현악기 제작 공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아한 클래식 음악의 진원지치고는 안타까울 만큼 좁고 누추하다. 작업 테이블 하나로 꽉 차는 13㎡의 공간. 벽면에는 주인조차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공구가 빼곡히 채워져 있다. 문턱 하나를 넘으니, 악기 원자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나무를 다루는 기계가 곳곳에 있다. 생명력 없이 쌓여 있는 나무판이 한 사람의 손길을 거쳐, 악기로 소리로 다시 태어난다니 그저 놀랍다.
문병식(50) 현악기장은 30여 년 긴 세월 나무를 만지며 살아왔다. 그간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지나고 보니 아득히 먼 일처럼 느껴진다. 그가 만든 악기를 품에 안고 행복해 하던 사람들 덕에 고생이 낙이 된 시간이었다.
열일곱 고등학교 시절, 기술 시간에 서툰 솜씨로 처음 만돌린을 완성했다. 형편이 여의치 않아 현악이라곤 들어본 적도 없지만, 우아한 곡선이 흐르는 몸체에서 나오는 악기 소리에 마음을 빼앗겼다. 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먹고살 길을 찾아 인천으로 왔다. ‘바이올린 제작자 구함’. 어느 날 골목 담벼락에 붙은 구인 광고가 시선에 들어왔다. 그렇게 악기를 만드는 삶이 운명처럼 시작됐다.

진짜 소리’를 찾는 여정

목재를 들여오는 항만을 품은 인천은, 일찍이 삼익악기와 영창악기 등 대형 악기업체들이 자리 잡으면서 악기 산업이 발달했다. 한 작은 공장에 들어가 바이올린 몰드를 만드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해 뜨기 전부터 저물기까지 나무를 자르고 깎고 붙이는 일을 했다. 선배들에게 맞아가면서 꿋꿋이 기술을 배웠지만 성에 안 찼다. 미국에서 들어온 바이올린 제작 원서를 구해 그림만 보고 따라 하다, 학창 시절 영어 선생님을 찾아가 우리말로 번역하며 어렵사리 공부했다.
그의 거친 손이 바이올린 몸체를 다듬느라 분주하다. ‘포항으로 보낼 자식’이라고 했다. 가격과 상관없이 아이를 낳는 심정으로 모든 악기를 만든다. “악기는 거짓말을 안 합니다.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지요. 누군가에게 마지막 악기가 될 수 있다는 심정으로 모든 공정에 혼신의 힘을 쏟습니다.”
오로지 사람의 손으로 나무를 깎고 다듬고 조립해 소리를 완성하는 일이다. 하면 할수록 알면 알수록 어렵다. “생에 처음 악기를 완성하고,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제가 너무 교만했습니다.” 악기 제작 주문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자고 나면 머리가 하얗게 셀 만큼 힘든 과정이 이어진다. 30여 년 경력 현악기장의 ‘진짜 소리’를 찾는 여정은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악기는 거짓말을 안 합니다.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지요.
30여 년 경력 현악기장의 ‘진짜 소리’를 찾는 여정은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누군가의 삶을 연주하는 일

골목 어귀 작고 초라한 공방이지만, 여기까지 오기 결코 쉽지 않았다. 1990년대 초반 그는 다니던 공장을 그만두고 경인교대 앞에 6㎡짜리 지하 공방을 처음 열었다. 서울 낙원상가에서 나무판을 사다 악기로 만들어 팔았는데, 솜씨가 좋다고 소문나면서 찾는 사람이 늘었다. 그러다 1997년 대한민국에 불어닥친 IMF 외환위기에 휩쓸렸다. 중국으로 건너가 4년간 악기 기술자로 밤낮으로 일하고 다시 한국으로 왔다. 작전동에서 165㎡ 2층 규모에 실용음악 학원까지 갖춘 번듯한 악기점을 냈다. 좋은 시절은 길지 않았다. “바다는 메워도 사람의 욕심은 못 채운다”라고 했다.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하다 결국 부도를 맞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세상 풍파에 쫓기다 여기 안착했어요. 비로소 제 집으로 온 것 같습니다. 비록 세를 내고 있지만, 언제든 나를 품어주는 공간이잖아요.”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집보다 여기서 먹고 자고 하는 일이 더 많다. 이 안에선 몸이 고되도 마음은 편하다.

콧대 높은 클래식 음악계에서 공장 출신이라는 이력으로, 그는 외롭고 고단한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힘들었던 일보다 그래도 뿌듯했던 기억이 더 많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힘들었던 한 여대생은 그가 수리비만 받고 만들어 준 악기로 꿈을 이뤄 음악 선생님이 됐다. 한 여중생은 그가 건네준 악기로 예고, 예대에 들어가 현악기의 본고장인 이탈리아 크레모나(Cremona)에서 현악기 제작자의 길을 걷고 있다.

“제가 만든 악기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가요.” 나무 먼지가 부유하는 공방 천장에는 주인을 찾는 악기들이 도열해 있다. 그 언젠가 누군가의 삶을 아름답게 연주할 날을 기다리는….

“내가 만든 악기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면….”
그 언젠가 누군가의 삶을 아름답게 연주할 악기가,
그의 손에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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