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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공간 – ⑪ 인일철공소

불보다 뜨겁고
쇠보다 단단한

공간은 곧 사람을 의미한다. 숨 쉬고 머무는 자리마다 살아온 시간과 삶을 대하는 태도, 생각이 스며든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아주 사적인 공간’에 들어가, 그 안에 숨겨진 또 다른 인천을 본다. 이번 호에는 65년 쇠를 주물러 온, 도원동의 철공 장인을 만났다. 힘든 외길 인생.
고집불통 쇠도 그 앞에선 고개를 숙이고 물러졌다 더 단단하게 몸을 다진다.

 

정경숙 본지 편집장 | 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

‘인일철공소’의 송종화 장인.
팔순이 넘은 나이지만, 강철 같은 모습이 영락없는 대장장이다.
나이가 드니 자꾸 작아진다며 그가 깊게 주름 팬 손을 보여준다.
그 손으로 휘두르던 쇠망치도 세월에 닳아 무뎌졌다.
도원동 철공소 거리.
이곳에서 망치질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까, 두렵다.
그가 인천의 마지막 대장장이가
아니길 바란다.

‘쿵, 윙윙~ 끼이익~’ 귀를 찢는 듯한 굉음 소리에 순간 몸서리가 쳐진다. 미추홀구 도원동 철공소 거리의 ‘인일철공소’. 쇠를 때리고 깎는 기계 소리가 굴속 같은 공간을 뒤흔든다. 노장은 엄청난 굉음과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묵묵히 쇠를 다룬다. 아직 말 한마디 섞지 않았지만, 그의 넓은 등이 이미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탕탕탕~’ 망치로 쇳덩이를 내리치는 그의 손에 한껏 힘이 실린다. ‘인일철공소’ 송종화(81) 장인. 팔순이 넘은 나이지만, 강철 같은 모습이 영락없는 대장장이다. 시뻘겋게 달궈진 쇠붙이가 망치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제 모양을 찾아간다. 불꽃이 사방으로 튀번진다. 그리고는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로 쇳덩이가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한다. 차마 말을 건넬 수 없어, 작업을 마칠 때까지 몇 시간이고 기다렸다. 이윽고 그가 알은체를 한다. 주문받은 일인가, 물으니 가끔 찾는 손님이 있어서 ‘그냥’ 만들어 놓는 것이라고 한다. 평생 망치질하며 살아온 세월, 이젠 쉬는 법조차 잊어버렸다. 자신에게 관대한 시간을 사는 건 그에게 게으름이고 사치다.

1953년, 열다섯의 나이에 도원동 ‘황곡철공소’에서 처음 쇠망치를 손에 쥐었다. 스승의 이름은 권원. “선생을 잘 만났어. 그분이 ‘왜정’ 때부터 일을 꼼꼼히 잘했지. 이 일대에서 농기구 잘 만들기로 꽤 이름났었어.” 제물포에서 태어나 살던 집이 6·25전쟁 때 폭격을 맞았다. 할머니와 어린 4형제는 아침을 먹다, 맨몸으로 뛰쳐나와 겨우 목숨을 건졌다. 삶을 구했으니 먹고살기 위해 나서야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장장이의 길로 들어섰다.

제물포 개항장에서 서울로 넘어가는 길이었던 도원동 참외전로. 황골고개라고 불리던 이 거리엔 철공소와 철물점이 줄지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6·25전쟁 후로 철공소가 하나둘 터를 잡기 시작했다. “전쟁을 겪으며 황해도에서 온 사람들이 여기까지 모여들었어. 그중에 북에서 대장일을 하다 온 사람도 있었지. 먹고살려고 농기구며 난로, 연통 등을 만들어 내다 팔았어.” 일제강점기 일본 사람에 밀려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 있던 수도국산 자락에, 고향을 잃은 피란민까지 얽히고설켜 살았다. 북에서 갈고닦은 대장 기술도 함께 흘러들었다.

“자고로 대장일을 하려면 힘만 있어선 안 돼. 머리가 좋아야 하지. 눈썰미가 있어야 하고, 손재주도 있어야 해. 열 사람이 배우면 한 사람도 되기 어려운 게 대장장이야.” 그는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듯, 쇠도 질과 강도가 다 다르다고 했다. 그 성질에 맞춰서 쇠를 다스리고 물건을 빚어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야끼(やき)’야.” 담금질하는 열처리 과정을 말한다. 모양을 아무리 잘 낸들 소용없다. 담금질을 잘해야, 쇠가 무르지도 딱딱하지도 않고 ‘단단’해져 제구실을 한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어. 쇠를 불에 달구고, 때리고, 물에다 넣어 직접 감을 잡아야 알지.” 65년 한길만 걸어온 장인조차, 대장일은 죽을 때까지 다 못 익힌다며, 지금도 배우고 있다 했다. 그만큼 힘든 길이지만, 고집불통 쇠도 그 앞에선 고개를 숙이고 물러졌다 더 단단하게 몸을 다진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한 행인이 쇠를 다루는 그를 보며 말한다. “저게 바로 고려청자를 빚는 정신이지. 저분은 고려청자 장인과 다를 게 없어.” 술 냄새를 훅 끼치며 하는 말인데도, 허튼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묵묵히 걸어온 65년 외길 인생,
그의 뒷모습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창때는 옛 인천공설운동장(현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주변을 시작으로, 양쪽 길을 따라 대장간들이 마주 보고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이곳 사람들이 서울 을지로에 있던 옛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주변으로 가 대장간을 내기도 했다. 그러다 1960년대 경인선 복선화 공사로 원래 철공소들이 있던 한쪽 길을 철길에 내주었다.
송종화 장인은 1976년 지금의 자리로 왔다. 중간에 다른 도시로 가 부동산에 손을 대고, 연안부두에서 닻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제자리로 왔다. 바로 옆 ‘인천철공소’에선 막냇동생 송종원(77) 어르신이 쇠를 만진다. 둘째 형인 송종화 장인으로부터 대장일을 배웠다. 쇠를 불에 굽다 녹여 떨어뜨리는 바람에 매도 많이 맞았다. 쇠를 깎다 쇳가루가 눈에 박혀서 십대 때 한쪽 눈을 잃기도 했다. 하지만 후회도, 형을 원망한 적도 없다. 아버지 같은 형을 자랑스러워하며 지금도 의지하고 산다. “사연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대장일 배워서 밥 먹고 사는 데 지장 없었으니까. 그 양반이 여든이 넘었는데 아직 힘이 좋아.”

 

좋은 시절도 있었다. 1970, 1980년대는 인천제철(현 현대제철) 같은 큰 공장에서 주문하는 부품을 만들었다. 들어오는 대로 일을 다 했다. 사람을 셋이나 뒀다. 공정이 까다로운 작업을 마치면 가슴이 부듯했다. 송종화 장인이 호기롭게 말한다. “예전에 인천제철에 들어가는 볼트를 만들었는데, 크기가 한 육각형 성냥갑만 해. 각을 맞추면서 혹을 하나 달아야 하는데, 그게 참 만들기 어려웠지. 일을 마치면 ‘내가 작품을 만들었구나, 기술자가 맞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
다 지난 일이다. 그의 손길을 필요로 하던 공장들이 기계를 쓰고, 아래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일이 끊겼다. “어쩌다 한번 일이 들어와. 기약이 없어. 허허.” 대장간은 거의 문 닫고 이제 인일, 인천, 인해, 도원 철공소 네 곳만 남았다. 거의 그로부터 기술을 배운 사람들이다. “전에 같이 배우고 일한 사람들은 다 죽고 없어. 지금 이 일대 대장장이들은 거의 내가 가르친 사람들, ‘일흔밖에’ 안 된 ‘젊은이’들이야. 내 연조가 가장 깊지.” 언젠가는 공주의 한 대학에서 쇠를 배웠다는 젊은이가 찾아와 일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며칠을 못 버티고 나갔다.

 

쇳가루 자욱한 철공소에 자신을 가두겠다는 사람은, 이제 없다. 그가 나이드니 자꾸 작아진다며 깊게 주름 팬 손을 보여준다. 그 손으로 휘두르던 쇠망치와 받침으로 쓰던 쇳덩이 ‘모루’도 세월에 닳아 무뎌졌다. 최근 1970년대부터 ‘배 못’을 만들던 동구 신일철공소가 철거 논란에 휩싸였다. 이곳은 2007년 대장장이가 눈감으면서 먼지 속으로 침잠했다. 언젠가 도원동 거리에도 망치질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까, 두렵다. 그가 인천의 마지막 대장장이가 아니길 바란다.

힘세고, 머리 좋고, 눈썰미와 손재주도 있어야 한다.
열 사람이 배우면 한 사람도 되기 어려운 게 대장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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