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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맛 – ③ 송림동 ‘닭알탕’

내일을 살아갈 힘 닭알탕

인천만의 ‘그 맛’이 있다. 지역 음식에는 고유한 환경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끝낼 일이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뿌리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인천의 먹거리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손맛을 기록한다. 그 세 번째는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배부른 위로를 건네는 송림동 ‘닭알탕’이다.

 

정경숙 본지 편집장 | 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

송림동 닭알탕은 인근 공장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달래던 ‘소울 푸드’였다.
아침에 퇴근하는 사람 한잔,
오후에 또 새벽에 일 마친 사람도 한잔.
하루 종일 술 마시던 동네가 바로 여기다.

“이래 봬도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소문난 맛이에요.” 1970년대 돈을 벌기 위해 머나먼 이국땅에서 건설 노동자의 삶도 마다하지 않던 시절, ‘닭알탕’은 현지 한국인 노동자들이 섭씨 50도를 넘나드는 타향에서 고된 밥벌이를 하며 그리워하던 ‘한국의 맛’이다.
25년 전부터 송림동에서 닭알탕을 끓여온 고강심(62) 씨는 말한다. “한국인 노동자들 사이에 ‘인천에서 먹던 닭알탕이 그립다’ ‘인천에 가면 꼭 먹어보라’는 말이 돌았다고 해요. 중동에서 일한 부산 사는 양반이 수소문해 온 적도 있어요.” ‘도대체 닭알탕이 뭐길래.’ 먼 길을 찾아온 끝에 허름한 가게를 맞닥뜨리고는 고개를 갸웃했을 테다. 하지만 이내 칼칼하고 진한 국물을 맛보고는 탄성을 질렀으리라.
닭알은 죽은 암탉의 뱃속에서 꺼낸 알이다. 며칠만 있으면 달걀이 될 것을, 그전에 닭을 잡아 노른자만 뭉쳐있다. 보통 노른자는 퍽퍽한데 닭알은 쫀득하고 탄력이 있다. 윤기 자르르 흐르는 노란 알과 알집을 육수에 넣어 얼큰하게 찌개로 끓여 먹으면 가슴까지 후끈하다.

송림동 닭알탕 골목의 역사는 5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너도나도 가난했던 시절, 전국의 노동자들이 먹고살기 위해 공장 굴뚝 연기를 따라 인천으로 왔다. 닭알탕은 인천제철(현 현대제철), 동국제강, 대성목재 등 인근 공장 노동자들의 고단함을 달래고 빈속을 채우던 ‘소울 푸드’였다. 한 냄비 푸짐하게 끓여도 단돈 1,500원. 가진 사람들이 살코기를 먹는 동안, 가난한 이들은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고 든든하게 먹어, 내일을 살아갈 힘으로 비축했다.

닭알탕은 죽은 암탉의 뱃속에서 꺼낸 알과
알집이 주재료다.
1971년 4월 현대시장이 들어서기 전엔 노점상이 즐비했다.
죽은 암탉의 뱃속에서 꺼낸 알들을 팔았다.
주인장이 직접 담근 열무김치를 얹은 밥.
낙지볶음과 함께 나간다.(창석닭알탕)
창석닭알탕의 고강심(왼쪽) 대표와 식당 식구들.
가진 사람들이 살코기를 먹는 동안,
가난한 이들은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고 든든하게 먹어,
내일을 살아갈 힘으로 비축했다.

밤낮으로 일하는 걸 당연히 여기던 시절이었다. 3교대 근무자들이 퇴근길마다 몰려드니 가게는 동트기 전부터 늦은 새벽까지 발 디딜 틈 없었다. “하루 종일 술 마시던 동네가 여기야. 아침에 퇴근하는 사람 한잔, 오후에 또 새벽에 일 마친 사람도 한잔. 죄다 작업복 입은 사람들이었어. 싸고 푸짐하지. 막걸리까지 마시면 또 얼마나 든든해.” 얼근히 취기가 오른 식당 단골 어르신들이 지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인생의 쓴맛이 깊을수록 술맛은 달다. 저마다 삶의 무게를 짊어진 사람들은 오늘도 따듯한 식사와 술 한잔으로 지친 하루를 위로받는다.

뜨거운 정으로 맺은 인연이다. 정봉덕(79) 할머니는 44년 전 이 골목에 식당을 차렸다. 당시 돈이 없어서 100원짜리 잔술 한 잔만 시키던 손님도 많았다. “커다란 솥에 닭알탕을 끓이고 있으면 뒤에서 물끄러미 쳐다들 봐요. 내 안쓰러워 한 국자씩 떠서 나눠줬지. 그러면 국물을 홀짝 마시곤 ‘땡그랑’ 소리를 내며 100원짜리 동전을 두고 나가. 그런데 한참 일하다 돈을 챙기러 가면 다시 가져가고 없어.” 얼마나 배고팠으면…. 시커먼 공장 안에서 거대한 쇳덩이를 움직이며 온 힘을 쏟아냈다. 주머니가 비었어도 일단 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할머니는 식당 일을 하면서 외상으로 파는 일이 허다했다. 손님들이 돈 대신 주민등록증에 입던 옷까지 벗어두고 갔다. 그러면 괜찮다며 옷을 도로 입혀 보냈다. 손님은 고마워하면서도 그 뒤로 다시 가게를 찾지 않았다.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속아준 거지.” 속 썩인 ‘놈’과 착한 사람은 지금도 기억난다고 했다.

 

당시 청년이었던 손님이 세월에 깊이 주름살 파인 채 손주 손을 잡고 찾아오기도 한다. 그러면 떨어졌던 가족을 만난 것처럼 서로 부둥켜안고 반가워한다. “단골들이 앞으로 20년은 더하라고들 해. 그럼 내가 100살인데. 허허.” 그들이 사고파는 건 돈으로 계산하는 음식이 아니다. 그리움이고 추억이다.

저마다 삶의 무게를 짊어진 사람들은,
오늘도 따듯한 식사로 지친 하루를 위로받는다.
감자탕, 닭볶음탕, 생선알탕.
그 시절 메뉴는 오직 닭알탕이었지만
지금은 시대 따라, 입맛 따라 식단이 다양해졌다.
손님들이 삶을 달래는 동안,
주인들은 치열한 삶을 일구었다.
형제닭알탕 정봉덕 할머니.

손님들이 삶을 달래는 동안, 주인들은 치열한 삶을 살아냈다. 정 할머니는 이 골목의 최고령자다. 남들이 보기엔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 자리에 그의 젊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30대부터 지금껏 식당에 틀어박혀 장사를 했다. 4남매 다 대학까지 학비를 대고 시집 장가 보내고 아파트까지 사 줬다. 그 사이 어머니의 곱던 얼굴은 나이테 같은 주름으로 뒤엎였다.
고강심 씨는 부지런하기로 이 골목에서 둘째가라면 서럽다. 오전 10시에 문 열고 밤 12시가 돼서야 하루를 마무리한다. 뜨거운 불솥 옆에서, 오늘도 어제처럼 묵묵히 밥 짓고 음식을 만든다.
봄꽃처럼 화사했던 시절도 없었다. 열일곱 살에 전라남도 영광에서 인천으로 와 이건산업 합판 공장에 들어갔다. 화장실만 갔다 와도 합판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일요일 아침에 공장으로 출근하면 월요일 저녁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36시간 내내 쉬지 않고 움직였다. “잠도 안 자고 일했어요. 그때는 모두 그렇게 살았으니까. 힘들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그런 시절이 있기에 지금 우리나라가 이렇게 발전한 거예요.”
평생을 치열하게 살아온 그는 쉬는 법을 모른다. 여유와 게으름은 사치일 뿐. 어려움을 모르는 젊은 세대가 걱정스럽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우리 아들들은 고생시키지 않겠다며, 벌 수 있을 때까지 벌어 손주들 학비까지 당신 손으로 보태겠다고 한다. 어머니는 어머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 닭알탕 골목에 하나둘 불빛이 차오른다. 퇴근길 한잔 생각에 들른 직장인들, 주머니 가벼운 젊은이들, 추억을 찾아온 단골들. 저마다의 속내를 내려놓고 어울리다 보면 누구라도 친구가 된다. 술잔이 오가고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는 사이, 밤이 깊어간다.
술기운이 거나하게 오른 한 손님이 말한다. “땀 흘리며 일한 사람들의 특권이에요. 삶의 노고를 달래주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서로의 모습에 위로받고, 살아갈 힘을 얻는 곳. 우리가 여전히 후미진 송림동 골목을 찾는 이유다.

송림동 닭알탕 골목
인천 동구 샛골로 169
옛 현대극장과 송림동 서흥초등학교 사이,
현대시장 건너편에 다섯 집이 사이좋게 붙어 있다.
창석닭알탕 Ⓣ 032-764-6160 형제닭알탕 Ⓣ 032-766-0171 송림닭알탕 Ⓣ 010-8501-3922
마산닭알탕 Ⓣ 032-773-6537 현대닭알탕 Ⓣ 032-766-8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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