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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아침

배다리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가수 송창식에게 배다리는 음악의 모태였다. 신흥초등학교 시절 ‘인천의 3대 거지’로 불릴 정도로 가난했던 그는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심취한 송창식은 20대 초반 틈만 나면 배다리 헌책방 거리를 찾았다. 그는 이때 수십 개에 이르는 헌책방을 전전하며 ‘음악’이란 단어가 들어간 책이란 책은 모조리 탐독한다. 화성학, 음악 평론 등 주로 음악 이론에 관한 책들이었다. ‘피리 부는 사나이’ ‘왜 불러’ ‘한번쯤’ ‘토함산’ ‘선운사’처럼 훗날 국악적 빛깔이 가미된 수많은 히트곡을 작곡 할 수 있었던 것도 배다리 헌책방에서의 음악 이론 독학 시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의 히트곡 가운데 ‘담배가게 아가씨’는 배다리에 있던 작은 담뱃가게를 모티브로 만든 곡이기도 하다. 수년 전, 그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 배다리 헌책방 인근 한 귀퉁이에 작은 담뱃가게가 있었는데 담배를 파는 ‘짧은 머리 곱게 빗은’ 아가씨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고 허허 웃으며 송창식은 말했다.

1970~1980년대 배다리는 학생들로 넘쳐났다. 새 학기만 되면 까까머리, 단발머리 남녀 학생들이 새카맣게 모여들었다. <수학의 정석> <성문종합영어>와 같은 학습 교재는 물론이고 교과서도 활발히 거래됐다. 지금은 아벨서점, 한미서점, 삼성서림 등 대여섯 개만 남아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1970년대엔 40여 개의 헌책방들이 성업을 이루며 서울 청계천, 부산 보수동과 더불어 전국 3대 헌책방 거리로 이름을 날렸다.

애관극장이 있는 중구 경동의 동쪽 방향으로 가다 경인전철 철교 아래를 지나 동구 금창동 초입에서 만나는 배다리. 지금은 복개됐지만,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이곳엔 물이 드나들었다. 동구 화수동 괭이부리에서 수문통을 지나 지금의 송림초등학교 앞에 이르는 커다란 갯골을 따라 들고 나는 바닷물이었다. 배다리란 이름이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경인철도가 개통하기 전까지 배를 댈 수 있는 ‘잔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잔교는 사람들이 건너는 다리가 아닌 배를 대는 구조물로, 모양이 다리처럼 생겨 이 같은 이름으로 불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천 개항과 함께 1883년 중구에 일본 조계, 1884년 청국 조계를 비롯한 각국 조계가 형성되면서 인천 사람들은 배다리 지역으로 모여들었다. 1892년 영화학당(현 영화초등학교) 설립, 1907년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가 개교하고 점차 정미소, 양조장, 성냥 공장 등이 들어서면서 배다리 지역은 인천의 대표적 역사·문화 공간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그런 배다리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시기는 1999년 ‘동구~중구 연결도로’ 사업 추진을 하면서다. 물류 비용 절감과 교통 흐름 개선을 위해 인천의 남북을 잇는 핵심 연결망 구축 사업이었지만 주민들은 마을 간 단절, 교통난 가중, 환경 피해 등을 이유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멈춰선 채 20년이 흐르다 인천시의 소통 행정으로 최근 배다리도로 사업에 대한 민관 논의가 재개됐다. 논란이 됐던 3구간(일명 쇠뿔배다리 구간)을 지하화하고 그 위에 ‘주민 행복’ 공간을 조성하는 게 핵심이다. 그럴 경우 주민들의 걱정은 상당 부분 해결된다. 여기에 공사 기간 안전 조치는 물론이고 매연·소음 최소화, 제한 속도 50km 등 시는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첫 걸음마를 시작했을 뿐, 20년 과제가 하루아침에 풀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주민과 시가 손을 맞잡고 한 방향을 바라보며 걸어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소통과 협치’를 최우선 가치로, ‘우리 모두의 배다리’를 위한 아름다운 대화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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