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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아침 / 칼럼

개항 136주년,

인천항의 미래

글 · 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몇 년 전 얘기다. ‘대호’(감독 박훈정)의 개봉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애관극장으로 달려갔다. 조선의 ‘범포수’를 영화는 과연 어떻게 구현했을까. 정말 궁금했다. 단 한 차례만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화승총을 들고 호랑이를 찾아다니는 사내. 그렇게 깊은 산중에서 맞닥뜨린 맹수를 한 발의 총알로 쓰러뜨리지 못하면 자신이 죽어야 하는 운명을 지고 살아가는 ‘호랑이 사냥꾼’을 보고 싶었다. ‘칸 국제영화제’ 취재차 칸(Cannes)에 갔을 때 만났던 배우 최민식의 깊은 눈빛을 해후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역시 연기파 배우였다. 산군(山君)이라 불리는 ‘어마무시’한 호랑이와 대결하는 천만덕(최민식 분)의 눈동자는 ‘올드보이’(감독 박찬욱)의 그것 이상으로 이글거렸다. 자식과 새끼를 지키며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는 인간과 맹수의 목숨을 건 대결이 이야기 얼개였고, 일제가 조선을 삼킨 1925년대가 시대적 배경이었다. 감독이 바라보는 지점과는 별개로 관람 내내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때 외세에 맞서 싸운 범포수를 읽어내려고 애썼다. 문호 개방의 요구가 해일처럼 덮쳐오던 19세기, 온몸으로 외세를 막아낸 범포수들의 그 무섭도록 고독하고 치열한 삶을 말이다. 강화도에서 발발한 두 양요 때 범포수들이 화승총 한 자루로 서양 함대에 맞서 싸울 수 있었던 저력은 호랑이를 때려잡는 용맹함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범포수들의 장렬하고 숭고한 희생이 있었음에도 1883년 2월 8일(음력 1월 1일) 인천은 결국 ‘개항’을 한다.
개항은 심각한 국권 침탈과 서구 신문물의 급속한 유입이란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당시 국제 정세로 볼 때 역사적 필연이기도 했다. 중국은 군사력을 앞세운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1842년, 일본은 최신예 함포를 탑재한 군함 구로후네(黑船)를 띄워 위협한 미국에 항복하며 1853년 각각 개항했던 터였다.

인천의 입장에서 개항은 위기이자 기회였다. 한적한 어촌이던 제물포 일대가 개항장으로 변모하며 여러 나라들이 속속 몰려들었고 인천을 나눠먹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에 국제 사회처럼 보였지만 인천은 일본 식민지 경영의 교두보였을 뿐이다. 대대로 살아온 생활 터전마저 빼앗겼다. 바닷가 풍광이 아름다운 제물포 일대를 조계지란 이름으로 외국인들이 차지하면서 인천 사람들은 홍예문 밖 동쪽으로 밀려 나가야 했다. 개항 직후 인천 지역 사회 상공업이 번창했다지만 결국 인천 사람들의 토지와 노동력을 수탈한 일본인들만의 잔치였다. 한국사 전반에서 우리나라의 근대화가 ‘인천의 희생’을 담보로 이뤄진 것이란 얘기가 나오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반면, 신문물의 급속한 유입과 함께 조선시대 이래 해양을 통한 대외 무역 중심지가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동했고, 인천-서울 간 화물 수송이 활발해지며 화물 운송로가 해로에서 육로로 바뀌었다.
개항기, 대한제국을 근대 국가로 전환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주체가 인천항이다. 갑문 축조(1918), 196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 인천내항 도크 확장(1966~1975), 연안부두 축조(1973) 등을 통해 물류를 내보내고 들여오며 인천항은 우리나라 경제에 큰 축을 담당했다. 인천항을 품고 근현대사의 큰 줄기를 도도하게 흘러온 개항의 역사가 오는 2월 8일이면 136주년을 맞는다. 인천 시민과 인천시는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어떻게 하면 개항장과 인천항을 아름답고 풍요로운 땅으로 만들어갈 수 있을까. 자유공원에 올라 인천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다. 겨울 바다가 말을 걸어온다.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게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발 딛고 사는 땅은 후대로부터 잠시 빌려온 땅이란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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