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 인천 여성 독립운동가

뜨겁게 솟구친 대한민국 여성의 힘

곽낙원, 김란사, 최선화, 김유의, 조인애, 권애라…. 어두웠던 시대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했던 자랑스러운 인천의 여성들이다. 나라를 구하는 데 어찌 남녀가 따로 있으랴. 100년 전 대한민국의 수많은 여성이 총칼 들고 앞장서 싸우는가 하면, 뒤에서 밥 짓고 옷을 기우며 묵묵히 이 땅의 독립을 이뤄냈다. 다만 알려지지 않았고 그래서 잊혔을 뿐이다. 오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역사가 되어 마땅한 여성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 누구보다 뜨겁고 강했던.

정경숙 본지 편집장

대한독립여자선언서
1919년 간도(間島)에 있는 애국부인회가
우리나라의 독립을 선언한 글이다.

오늘, 100년 전 그날의 함성이 내일의 희망으로 뜨겁게 솟구친다.
하지만 자신을 버리고 나라를 지킨, 역사가 되어야 할 수많은 사람이 잊혔다.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 모두
오늘 우리를 있게 한
대한민국의 아버지, 어머니라는 사실을.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여성은 없다. 하지만 1919년 뜨거웠던 그날, 여염집 아낙, 기생, 학생 할 것 없이 수많은 여성이 대한민국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반면 지난해 11월 17일 기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1만5,180명 중 여성은 전체의 2.3%인 357명에 불과했다. 태극기 뒤에서 헌신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소리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세상은 독립운동하는 남편과 아들 뒷바라지하는 것을, 여자들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여겼다. 주체적으로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는 여성마저 제 이름이 아닌 누군가의 어머니, 아내, 딸로 불렸다. 이 땅의 수많은 여성이 긴 세월 일제에 대항하면서 남성 중심적인 사회와도 맞서 싸워야 했다.
지금껏 대한민국 여성 독립운동사에 대한 기록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다, 1990년대에 들어서야 서서히 연구되기 시작됐다. 하지만 아직 역사의 기록 속에 글 한 줄 사진 한 장조차 찾아보기 힘든 독립운동가가 많다. 다행히 최근 알려지지 않은 영웅들을 기리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그동안 소외됐던 여성과 의병 독립운동가 1,900여 명을 발굴했고, 이에 국민 73.5%가 ‘잘한다’라고 평가했다. 그중 여성 독립운동가는 202명이고, 26명에게는 서훈과 포상이 결정됐다.

어머니의 이름으로
곽낙원(1859~1939)

애국장
사진 백범기념관

“우리가 독립운동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것도 독립운동이다.”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이 한 말이다. 그의 뒤에는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있었다. 아들을 위해 눈물 흘리는 대신 용기를 준 강한 어머니였다. 김구는 1896년 3월 9일 황해도 치하포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 스치다(土田讓亮)를 죽이고 해주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다, 1896년 8월 인천감리서로 옮겨져 사형선고를 받는다. 곽낙원 여사는 인천감리서로 이감된 아들을 따라 인천으로 와 옥바라지를 한다. 나라를 위해 몸 던진 자식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감옥에 갇힌 아들을 보며 “경기 감사가 된 것보다 더 자랑스럽다”라며 용기를 북돋웠다. 그리고 옥문 앞 객주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며 기꺼이 아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이후 1925년 황해도 안악에서 생활비를 절약해 모은 돈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1934년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 정부 요원들을 도우며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

붉은 피가 스민 땅에서
김유의(1869~1947) · 조인애(1891~1929)

대통령표창
사진 김유의 여사 강화중앙교회

100년 전, 인천의 여성들은 그 누구보다 뜨거웠다. 나라 지킨 선열들의 붉은 피가 스민 땅. 조선시대부터 바닷길로 쳐들어온 외세에 맞서 싸운 강화도의 기상은 일제강점기로 이어진다. 3월 12일, 강화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동맹 휴학을 한 다음 날 독립운동을 했다. 이때 강화공립보통학교 여자부 학생들도 나서서 만세를 불렀는데, 주동자 2명이 일본 경찰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었다. 3월 18일에는 강화읍 장터에서 유봉진을 선두로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음 날 42명이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야 겨우 풀려났는데, 그중에 유봉진의 아내 조인애와 선두교회의 전도부인 김유의가 있었다. 그들은 태극기의 물결 속에서 군중을 격려하며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김유의는 시위 전 14일 교회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 ‘국민회보’ ‘독립운동’ ‘독립가’를 받아 조선인들에게 배포하며 애국심을 끓게 했다. 두 사람 모두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선 ‘죄’로 6월형의 옥고를 치렀다.

개성을 움직인 강화의 딸
권애라(1897~1973)

애국장
사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개성의 3·1운동은 여성을 중심으로 움직인 대표적인 독립운동이다. 그 중심에 인천의 딸이 있었다. 1897년 강화도 교동에서 태어난 권애라는 네 살 때 개성으로 이주, 호수돈여학교 부설 유치원 교사로 일하던 중 3·1운동을 맞는다. “부인은 관계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는 호수돈여학교 서기 신공량의 말을 뒤로하고, 여성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개성 일대에 전한다. 그 힘으로 3월 3일 개성에서 첫 만세운동의 불길이 치솟았다. 이 일로 권애라는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천안 시위를 주도한 유관순, 수원 기생 시위를 이끈 김향화 등 여성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옥고를 치른다. 출옥 후에는 ‘반도의 희망’ ‘잘 살읍시다’ 등의 연설로 여성들을 깨우치고,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 한민족 여성 대표로 참가해 독립을 위해 힘쓴다. 여기서 그는 영화 ‘밀정’의 소재가 된 경부 황옥 폭탄 사건, 이른바 의열단 사건의 핵심 인물 김시현을 만나 결혼한다. 그는 아내를 ‘권 동지’라고 부르며 신뢰했다.

“조선의 등불이 되어라”
김란사(1872~1919)

애족장
사진 이화여자대학교 역사관

“조선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다오.” 김란사는 유관순 열사를 독립운동의 길로 이끈 스승이다. 그는 인천 바다를 통해 들어온 새로운 사상과 도전정신을 끌어안은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1872년 평양에서 태어나 훗날 한양(경성)에 살며 1893년 하상기와 결혼한다. 이후 남편이 1899년 인천별감(시장)으로 부임하면서 인천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앞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그는, 1894년 이화학당을 찾아간다. 처음엔 기혼 여성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하지만, 한밤중에 등불을 들고 룰루 프레이(Lulu E. Frey) 당장(교장)을 찾아가 “우리나라는 한밤중처럼 어둡다. 등불처럼 밝은 길을 열어달라”며 마음을 움직였다. 이후 1895년부터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하고 1906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문학사로 귀국, 이화학당 교사로 재직하며 자신이 배운 모든 것을 이 땅의 여성에게 바쳤다. 영어 실력과 외교력을 갖춘 김란사는 나라 안팎에서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해 늘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1918년부터 조선의 독립을 인정받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을 시도했으나 1919년 1월 고종의 승하로 좌절되기도 했다. 이후 3·1운동 직후인 4월 10일, 독립지사들을 만나기 위해 베이징(北京) 만찬회에 참석했다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장례에 참석한 선교사 베커는 “시신이 검게 변해 있었다”라며 타살로 추측된다고 증언했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당당한 대한민국 정부를 꿈꾸며
최선화(1911~2003)

애국장
사진 우리나비 출판사

1919년 3월 솟구친 뜨거운 함성은, 4월 11일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이후 임시 정부는 1945년 8·15 광복까지 중국 각지로 청사를 옮기며 독립운동을 했다. 1937년 12월, 중국 창사(長沙)에서 독립운동가 양우조, 최선화 부부의 맏딸 제시가 태어났다. 1937년 백범 김구 선생의 주례로 결혼한 부부는 임시 정부 내에서도 손꼽히는 지식인이었다. 아내 최선화는 인천 출신으로 이화여전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모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36년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는 1940년 한국독립당에 가담해 임시 정부를 지원하고, 같은 해 6월 동포 여성들과 함께 한국혁명 여성동맹을 결성했다. 이 단체는 임시 정부의 활동을 지원하고 아이들의 교육에 힘썼다. 1943년 2월에는 임시 정부를 따라 충칭(重慶)으로 가 1919년 3·1운동 직후 조직된 애국부인회의 재건에 힘쓰며 항일의식을 불태웠다. 그는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7월부터 1946년 4월까지 육아 일기를 썼다. 당시 임시 정부 독립운동가들의 생활상과 나라를 향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이 일기는, 훗날 부부의 외손녀 김현주에 의해 책 <제시이야기>로 세상의 빛을 본다.

참고 : <인천광역시사>, <여성독립운동가 300인 인물사전>, <강화3·1독립만세운동과 그 정신적 가치>, 국가보훈처 등
error: 무단복사 사용을 금지합니다.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