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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 인천 항일 독립운동

‘내나라’에서 외쳐야 했던 대한독립만세!!

전국 각지에서 독립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던 1919년 인천은 일본 땅이나 다를 바 없었다. 당시 인천 인구 중 절반이 일본인이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인천에서의 만세운동은 그 어느 지역에서 벌어졌던 시위보다
일본인들에게 충격이었다.
인천에서는 3월부터 격렬한 만세 시위가 시작됐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씩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기록에 남아 있는 인천에서의 대표적인 만세 시위를 정리했다.

김윤경 본지 편집위원

1919年

3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교) 동맹 휴학, 만세운동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전해 들은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3월 6일 동맹 휴학을 단행하고 만세운동을 펼쳤다. 3월 8일 학생들은 학교와 일제의 연락을 차단할 목적으로 학교 전화선을 절단하고 전화기를 부수며 격렬하게 항거했다.

3월 8일
인천 시내 독립선언서 다수 배포

 

시내 전역에 독립선언서가 뿌려지고 곳곳에 격문이 붙기 시작했다.

3월 24일
황어장터에서 600여 명이 만세운동

 

오후 2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을 이용해 부평시장과 계양면 장기리 황어장터에서 만세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청년들은 면사무소를 습격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이 총칼을 휘둘러 5, 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600여 명이 모여 항거했던 황어장터에서는 이은선이 일제의 칼에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3월 9일
만국공원(현 자유공원) 만세운동 전개

 

오후 5시 30분경 기독교인 및 청년 학생 등 300여 명이 만국공원에 모여 만세를 부르다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됐다.
오후 8시 30분경, 50여 명의 시위 군중이 어둠을 뚫고 경인가도 부근에서 만세를 부르다 경찰과 충돌했다.

3월 8일
인천 시내 독립선언서 다수 배포

 

시내 전역에 독립선언서가 뿌려지고 곳곳에 격문이 붙기 시작했다.

3월 12일~13일
강화공립보통학교 만세운동

 

학생들이 칠판에 태극기를 그려놓고 교내에서 만세 부르다 교직원들에게 저지당하고, 주동자들은 경찰에 연행됐다.

3월 27일

문학동 만세운동

 

3월 13일
소래면 주민들이 소래산에서 만세운동

3월 9일
만국공원(현 자유공원) 만세운동 전개

 

오후 5시 30분경 기독교인 및 청년 학생 등 300여 명이 만국공원에 모여 만세를 부르다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됐다.
오후 8시 30분경, 50여 명의 시위 군중이 어둠을 뚫고 경인가도 부근에서 만세를 부르다 경찰과 충돌했다.

3월 18일
강화읍 장터 만세운동, 2만여 명 참가

 

오후 2시, 강화읍 웃장터와 아랫장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조직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인천 만세운동 중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3월 28일
영종도(용유면) 만세운동

 

3월 23일 조명원, 조정서 등 11명이 ‘혈성단’이라는 비밀 항일 투쟁 단체를 결성하고 만세 격문을 배포한 데 이어 28일 관청리 광장에서 150여 명이 목이 터져라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

3월 19일~
강화 전 지역으로 만세운동 확산

 

온수리 천도교인 시위를 시작으로 불은면, 교동면. 삼산면. 서도면, 하점면 등 강화 전 지역으로 만세운동이 확산됐다.

3월 12일~13일
강화공립보통학교 만세운동

 

학생들이 칠판에 태극기를 그려놓고 교내에서 만세 부르다 교직원들에게 저지당하고, 주동자들은 경찰에 연행됐다.

3월 21일~24일
교동도 만세운동

 

3월 21일 교동도 주재소 앞에서 주민 80여 명으로 시작한 시위는 3월 22일 100여 명으로 늘었으며, 3월 23일 서한리와 동산리 주민 100여 명이 교동읍에서 시위를 펼쳤다. 3월 24일에도 100여 명이 모여 면사무소와 향교, 옛 관아 건물을 돌며 만세를 불렀다.

3월 30일
인천 내리 상가 철시 운동

 

인천 지역의 한국인 상점들은 가게 문을 모두 닫음으로써 만세운동에 뜻을 같이했고, 화평동과 북성동 일대에서 천도교인 수백 명이 만세 시위에 동참했다.

3월 24일
황어장터에서 600여 명이 만세운동

 

오후 2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을 이용해 부평시장과 계양면 장기리 황어장터에서 만세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청년들은 면사무소를 습격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이 총칼을 휘둘러 5, 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600여 명이 모여 항거했던 황어장터에서는 이은선이 일제의 칼에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3월 13일
소래면 주민들이 소래산에서 만세운동

3월 27일
문학동 만세운동

 

3월 31일
서창리(현 남동구 서창동) 주민 만세 모의

3월 28일
영종도(용유면) 만세운동

 

3월 23일 조명원, 조정서 등 11명이 ‘혈성단’이라는 비밀 항일 투쟁 단체를 결성하고 만세 격문을 배포한 데 이어 28일 관청리 광장에서 150여 명이 목이 터져라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

3월 18일
강화읍 장터 만세운동, 2만여 명 참가

 

오후 2시, 강화읍 웃장터와 아랫장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조직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인천 만세운동 중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3월 30일
인천 내리 상가 철시 운동

 

인천 지역의 한국인 상점들은 가게 문을 모두 닫음으로써 만세운동에 뜻을 같이했고, 화평동과 북성동 일대에서 천도교인 수백 명이 만세 시위에 동참했다.

4월 1일
월미도 만세운동

 

4월 1일
강화도 봉화 시위 시작

3월 31일
서창리(현 남동구 서창동) 주민 만세 모의

3월 19일~
강화 전 지역으로 만세운동 확산

 

온수리 천도교인 시위를 시작으로 불은면, 교동면. 삼산면. 서도면, 하점면 등 강화 전 지역으로 만세운동이 확산됐다.

4월 1일
월미도 만세운동

 

4월 1일
강화도 봉화 시위 시작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 13도 대표자 회의 소집

 

만국공원에서 이규갑, 홍면희, 안상덕 등 13도 대표들은 이날 독립운동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 임시 정부 수립을 결의했다. 이 임시 정부가 상하이(上海) 및 노령(露領) 대한국민의회와 더불어 3대 임시 정부 중 하나로 임시 정부 정통성의 근간이 된 ‘한성임시정부’다.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 13도 대표자 회의 소집

 

만국공원에서 이규갑, 홍면희, 안상덕 등 13도 대표들은 이날 독립운동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 임시 정부 수립을 결의했다. 이 임시 정부가 상하이(上海) 및 노령(露領) 대한국민의회와 더불어 3대 임시 정부 중 하나로 임시 정부 정통성의 근간이 된 ‘한성임시정부’다.

3월 21일~24일
교동도 만세운동

 

3월 21일 교동도 주재소 앞에서 주민 80여 명으로 시작한 시위는 3월 22일 100여 명으로 늘었으며, 3월 23일 서한리와 동산리 주민 100여 명이 교동읍에서 시위를 펼쳤다. 3월 24일에도 100여 명이 모여 면사무소와 향교, 옛 관아 건물을 돌며 만세를 불렀다.

4월 9일
덕적도 만세운동

 

사립 명덕학교 교사였던 임용우가 덕적면 동리와 진리 주민을 모아 덕적면 진리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다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다.

참고 : <인천광역시사>, <인천개항100년사>, 학술지 <강화3·1독립만세운동과 그 정신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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