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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아침 / 칼럼

죽산 조봉암과
‘인천 정신’

글 · 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연둣빛 새순 위로 핏방울이 떨어졌다. 찔레꽃, 개나리도 붉게 물들었다. 1960년 4월의 봄. 거리엔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거대한 파도가 일었다. ‘4·19혁명’을 전후해 우리나라에선 두 명의 정치 거목이 스러진다. 인천이 낳은 인물 죽산 조봉암(1899~1959)과 운석 장면(1899~1966). 죽산은 1959년 7월 3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운석은 1961년 5·16군사정변 다음 날 정치 생명을 잃는다.
강화도 선원면에서 태어난 죽산은 좌·우익 사상을 뛰어넘은 민족주의자였다. 농림부 장관 시절엔 토지개혁으로 농민들에게 살아갈 희망을 안겨주었고 공산·자본주의를 초월한 평화통일을 주창했다. 국민들의 지지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그를 정적들이 가만 놓아둘 리 없었다. 죽산이 두 차례 출마한 대통령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자 자유당 정권은 그에게 간첩죄를 씌워 사형을 집행한다. 민족·민본주의자의 허망한 죽음은 국민들의 분노를 축적시켰다. 시간이 흐르면서 응축된 분노는 이듬해 3월 15일 ‘부정선거’란 뇌관을 건드리며 4·19혁명으로 폭발한다. 혁명 뒤 나라를 이끈 사람이 장면이다. 인천 화수동이 본적인 장면은 광복 후 정계에 뛰어들어 1956년 부통령, 4·19혁명 이후엔 제2공화국 총리에 취임한다. 1961년 5·16군사정변은 그러나 그에게서 총리직을 빼앗아간다. 같은 고향, 동갑내기의 정치 거물 2인이 죽음과 실각으로 정치 생명을 마감한 셈이다.

4·19혁명은 불의를 보면 반드시 항거하는 우리 국민의 성향을 잘 보여준 역사이다. 근현대 시기 물줄기가 틀어질 때마다, 우리 국민들은 어김없이 물길을 바로잡는 집단 지성을 피워냈다. 일제의 강압 통치를 떨쳐내려 전 국민이 봉기한 ‘3·1운동’, 대통령 직선제와 언론 자율화를 끌어낸 ‘6·10민주항쟁’, 대통령을 탄핵시킨 2016~2017년 ‘촛불혁명’ 등 우리나라 국민들은 적폐를 청산해야만 앞으로 나아가는 역사를 만들어왔다. 불과 70년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뤄낸 ‘대한민국 신화’를 쓴 건, 기적이 아닌 쟁취였던 것이다.
죽산과 운석처럼 격랑의 근현대사 한복판엔 언제나 인천의 인물들이 서 있었다. 3·1운동 때는 유관순 열사의 스승 김란사가 있었고, 만오 홍진 선생은 자유공원에서 13도 대표자회의를 열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을 숙의했다. 무수한 인천의 인물들은 ‘인천 5·3민주항쟁’을 일으켜 6월 항쟁을 예고하기도 했다.
인천시는 오는 4월 25일 학술 심포지엄을 열어 죽산의 생애를 재조명한다.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 경제 정의, 통일 노력과 같은 죽산의 삶을 돌아보고 나라의 미래를 논의하는 자리다. 인천 사람들이 회원인 새얼문화재단은 수년 전부터 조봉암 석상 건립 모금을 해왔다. 지금까지 5,000여 명이 참여했고 8억5,000만원을 모았다. 1992년 인천시립박물관 광장에 우현 고유섭 선생의 동상을 세운 새얼문화재단은 얼마 전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인천 출신 작곡가 최영섭(90) 선생에게 ‘장미헌정’이란 행사를 통해 생계를 지원하기도 했다. ‘인천의 정신’은 이처럼 시와 시민이 한마음으로, 인천인들을 기리고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죽산 서거 60주년이자 탄생 120주년인 2019년의 봄날. 사형을 앞둔 죽산이, 면회 온 청곡 윤길중(1916~2001) 선생에게 남겼다는 마지막 말이 귓전을 맴돈다.
‘어느 땐가 평화통일을 할 날이 올 것이고, 바라고 바라던 밝은 정치와 온 국민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네. 씨를 뿌린 자가 열매를 거둔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나는 씨를 뿌려놓고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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