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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아침

한국 철도 120주년,
시발지 인천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인천역’에 이처럼 많은 사람이 모인 적이 있었던가. 갓 쓰고 흰옷 입은 사람들의 물결은 철로에서부터 만국공원(현 자유공원)까지 이어진 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저 거대한 원통형의 쇳덩어리가 과연 굴러 갈 수 있을까. 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사람들은 증기기관차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철커덕철커덕. 기차가 철로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것도 잠시, 기차가 요란한 경적과 함께 군중의 바다를 가르며 서울 방향으로 멀어져 갔다. 기차 굴뚝이 뿜어낸 검은 연기가 허공에 잠깐 동안 머물더니 옅은 먹빛으로 파란 가을 하늘에 흩어졌다. 기차가 떠난 자리에 고추잠자리 떼가 날아다녔다.

1899년 9월 18일. 우리나라 최초의 기차가 인천역을 출발한다. 종착지는 노량진역. 이때 33.2km의 구간을 경인철도는 1시간 30분 만에 주파한다. 걸어서 하루 12시간 걸리던 거리였다. 인천과 서울을 1일 생활권으로 묶어준 경인선이 개통된 뒤 인천의 풍경은 무수한 희로애락이 교차한다. 교통은 편해졌다지만 요금이 비쌌고, 광복하던 해인 1945년까지는 일제 식민 정책을 수행하는 수단으로 운행됐던 것도 사실이다. 철도 주변 초가집들은 이따금 날벼락을 맞기도 했다. 기차가 내뿜는 연기와 함께 튀어나온 불티가 초가지붕을 홀랑 태우곤 했던 것이다. ‘기차 통학생’이란 문화도 생겨났다. 1915년 경인선의 고객층 가운데 하나는 서울로 학교를 다니는 인천 학생들이었다. 당시 인천지역 초등학교 졸업생이 평균 400여 명 정도였으나 중등학교 수용 능력은 150명에 불과했고, 이 때문에 200여 명의 학생들은 서울에 있는 학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고 신태범 박사는 저서 <인천 한 세기>에서 “남학생은 앞 칸, 여학생은 맨 뒤 칸이란 불문율이 있었으며 남학생들은 학교별로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고 기차 통학생 시절을 회고한 바 있다.

경인철도는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터이기도 했다. 마땅한 장남감이 없던 시절, 아이들은 철로 위에 못을 얹은 뒤 기차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못이 튕겨져 나가기 일쑤였지만 자리를 잘 잡은 못은 납작한 칼 모양이 되었다. 아이들은 이 ‘못칼’을 ‘맥가이버 칼’처럼 갖고 놀며 철도의 기억을 가슴에 새겼다. 십정동 출생 투포환 금메달리스트로 ‘아시아의 마녀’란 별명을 가진 백옥자는 어린 시절 남자 아이들과 철길을 따라 달리기 시합을 하며 체력이 단련된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석탄 실은 열차가 지나갈 때면 그 주변으로 부녀자들과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여자들은 열차가 흘린 석탄 가루를 주워 모았고, 꼬마들은 아예 기차 위로 올라가 석탄을 바닥으로 떨어뜨린 뒤 뛰어내려 가져가기도 했다. <괭이부리말 아이들> 같은 문학 작품을 탄생시킨 중요한 모티브도 기찻길이었다.

경인철도 개통 75년 뒤인 1974년엔 ‘전철’의 시대가 열린다. 1960년대 이후 급속히 진행된 공업화, 도시화는 대중교통의 확충을 필요로 했고, 그 해 8월 15일 경인전철(수도권 전철 1호선)이 개통한 것이다. 인천과 서울은 더 가까워졌고 일자리를 찾아, 살 집을 찾아 인천으로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1980년대 경인전철은 민주 세력의 규합을 도모하는 주요 교통수단이기도 했다. 1980년 5월 15일 동인천역에서 지역운동권 선포식을 가진 수천여 명의 인천지역 대학생들은 태극기를 든 채 우르르 전철에 올랐다. 그렇게 서울역광장에 도착한 인천 학생들은 서울의 수십만 학생들과 합류해 ‘전두환 사퇴, 비상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는 ‘5·15 남대문전투’를 치러냈다. 인천에서 출발, 120년을 달려온 철도는 이제 제2공항철도, GTX-B노선 예타 통과 등 미래 120년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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