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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아침 / 칼럼

3·1절 100주년,
다시 부르는 인천의 산하

글 · 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여보게 기자 양반, 뭐하려고 나를 신문에 낸다는 겐가. 난 싫으니까 어여 가봐. 한 움큼의 약을 입에 털어 넣으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A할머니가 손사래를 쳤다. 물에 말아 먹다 남은 밥과 잎이 마른 김치 조각, 깻잎 몇 장이 덩그러니 올라 있는 밥상이 처연했다. 약봉지가 나뒹구는 동굴 같은 단칸방에서, 온종일 누운 채로 할머니는 ‘연명’하고 있었다. 신문 기자 초년병 시절, 수소문 끝에 찾아낸 할머니는 일본군 성노예로 생지옥을 경험했고 광복과 함께 풀려난 뒤 평생을 혼자 살아왔다고 했다. 고향과 가족은 머릿속에서 지운 채로.
1997년 여름에 만난 ‘훈 할머니’는 아예 고국 땅조차 밟지 못한 경우였다. 열여섯 살 때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종전 후 캄보디아에 정착해 살던 할머니를 찾아낸 사람은 인천의 한 사업가다. 한국인을 보자 수줍게 “인천….”이란 단어를 내뱉은 ‘훈’이란 이름을 가진 할머니를 그는 인천으로 모셔왔고 할머니의 ‘고향 찾기’가 시작됐다. 수개월 동안 인천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애썼으나 허사였다. 전국의 언론이 가세한 가운데 마침내 경남 마산시 진동면이 할머니의 고향이란 사실이 밝혀진 것은 두 달도 더 지나서였다. 할머니는 성씨가 ‘인천 이 씨’였기 때문에 인천이란 단어를 기억하고 있었을 뿐, 인천은 그녀의 고향이 아니었다. 훈 할머니는 이후 한국에서의 삶을 시도했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프놈펜으로 되돌아가 2001년 눈을 감았다. 얼마 전 고 김복동 할머니가 별세하면서 생존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23명이라고 하지만, 제2의 A할머니, 제3의 훈 할머니처럼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분들이 더 많을 것이라 단언한다.

19세기 제국주의 열강들의 아시아, 아프리카 식민 지배는 대개 외교권과 군대통수권만 강탈하는 형태였으나, 일본의 식민 지배는 조선을 완전히 ‘일본화’하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행정까지 장악한 일제는 독립운동 탄압은 물론이고 650만여 명의 조선인을 끌고 가 마소처럼 부려먹었다. 군인, 군무원, 노무자, 위안부 등 강제 징용은 다양한 형태로 진행됐다. ‘귀향’ ‘군함도’ 같은 영화에서 보듯, 전장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한반도와 일본, 남사할린, 태평양, 동남아시아, 중국 만주의 탄광, 광산, 군수공장 등에서 죽음의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최근 대법원의 ‘미쓰비시(三菱) 징용피해자 배상판결’을 놓고 일본이 불만을 표시하고 있지만 이는 바다에 떠 있는 나뭇잎에 불과한 것이다. 위안부를 포함해 조선인 강제 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의 진심 어린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이 이뤄져야 하는 것은 그 엄청난 희생과 고통의 그늘이 여전히 한국 사회 깊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미래의 거울. 일본이 미래 우호적 한일 관계를 원한다면 과거는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이 정당한 처사다.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인천에선 우리나라 운명을 가르는 중요한 움직임이 포착된다. 그해 3월 6일부터 인천 전역에 들불처럼 번진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 황어장터, 강화도, 용유도 등지의 만세운동도 운동이지만 무엇보다 주목되는 사건은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서 열린 ‘13도 대표자 회의’다. 만오 홍진 선생이 주도한 13도 대표자 회의는 4월 11일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잉태한 역사적 회합이었다.
인천둘레길(125㎞)과 강화나들길(310㎞)을 종주한 시기가 있었다. 그때의 심정은 안타깝고도 고마운 것이었다. 빼앗긴 산하를 걸어야 했던 조상님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지금, 풀나무의 향기를 맡으며 우리 땅을 걷는다는 사실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 3월의 어느 봄날엔 다시 인천의 산하를 걸어야겠다. 김복동 할머니와 훈 할머니의 명복을 빌며, 나라를 위해 숭고한 희생을 치러낸 이 땅의 강제 징용자와 순국선열들을 향해 고개 숙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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